'자장면 회장님'의 6000억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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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회장님'의 6000억 기부
[머니투데이 박응식기자][[아름다운 CEO]이종환 관정교육재단 이사장]
- 제3회 한국CEO그랑프리, '아름다운 CEO상' 수상
"로마의 귀족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스스로 전장의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제국의 2000년 역사를 지탱해준 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이라고 했다.
그 같은 정신과 전통이 카네기와 록펠러,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등 서구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업 기부가 주류를 이루는 우리 현실에서 팔십 평생 기업을 일구면서 모은 전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한 개인 기부자의 미담도 매우 아름답게 다가온다.
지난해 11월2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3회 `한국CEO그랑프리' 시상식에서 `아름다운CEO'상을 받은 이종환 관정교육재단 이사장(82. 삼영화학그룹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6000억원 규모의 국내 최대 장학재단을 설립해 세계 1등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이종환 이사장. 2008년 무자년(戊子年) 새해 아침 그의 인생과 철학을 만나본다.
#국내 최대 장학재단
이 이사장은 2002년 사재 10억원을 출연해 관정교육재단을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수중에 있는 현금과 부동산 등 3000억원을 출연해 재단에 기부했다. 재산 기부는 이어져 현재 재단자산은 6000억원이 넘는다.
공익재단 전체로 보면 아산재단과 삼성문화재단 다음이지만 순수 장학사업만 펼치는 재단으로서는 국내 최대규모다. 삼성이나 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연매출 4000억원 규모의 중견그룹을 이끈 기업인이 만든 재단이란 점에서는 더욱 파격적이다.
관정재단은 우수학생 1인당 제공하는 장학금 규모나 선발인원에서도 국내 최대다. 이 재단을 통해 지난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주로 이공계를 중심으로 해외 유학생 100명, 국내 대학 재학생 1000명 등 총 1100명. 이들에게 지급된 총 장학금만도 자그마치 150억원에 달한다.
그가 이렇듯 인재양성에 자신의 전 재산을 출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70년대 말에 스위스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좁은 국토에 특별한 자원도 없는 데다 3개 언어의 다민족이 섞여 사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스위스는 세계 최고 부를 일궈냈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도 인재만 잘 키우면 스위스 못지않게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학생, 우수하지만 좀더 용기를 북돋워줘야 할 학생들을 지원해 준다면 언젠가는 그중에서 세계적인 인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이사장은 또 30여년 전 우연히 미국의 한 거대재벌가가 모텔 방에서 유언 하나 없이 혼자 초라하게 죽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돈 많으면 뭐합니까. 인생을 그런 식으로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때 언젠가는 죽기 전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조금 더 직접적인 계기는 둘째아들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면서다.
"아들녀석을 고치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했어요. 그런데 내가 환자 부모가 돼보니 우리나라 병원들이 너무 실망스럽더군요.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겠다고 생각했죠. 90년대 초부터 준비해 설계도를 완성하고 자금도 1000억원 정도 마련했어요. 그런데 허가가 안나는 겁니다. 여기저기 탄원도 해보고 취지도 알렸지만 안됐어요. 그래서 병원 설립의 뜻을 접고 대신 그 돈을 사회에 기부한 거죠."
그는 사회 여러 부문에서 자선가의 기부를 기다리고 있지만 인재 양성에 촛점을 맞췄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거기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업인이 기업활동의 결과로 축적한 자기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은 기업경영과는 별개의 문제겠지요. 작은 기부를 통해 미래의 재목이 될 인재를 길러낸다면 그것보다 더 큰 사회 기여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재산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역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다하려 하면 이도저도 안됩니다.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저에게 꿈이 있다면 우리 재단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으면 하는 것이죠."
장학재단을 운영하면서 우리 사회에 느낀 섭섭함도 감추지 않았다. 기부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너무 소홀하다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들 중에는 뜻있는 사회사업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문제는 자기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려고 해도 그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3000억원의 재산을 출연하는데 100억원의 세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또 재단 수익의 대부분이 임대소득에서 나오는데 이 소득에 대해 전면 과세를 하니까 장학사업 규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앞으로 공익재단 만드는 일에는 이런 부담을 덜어줘야 합니다."
#'자장면 회장님'
삼영화학그룹은 1959년 4월에 설립된 삼영화학공업이 모태. 석유합성수지 가공 플라스틱 전문 제조업체로 전자제품용 초박막 축전 콘덴서 필름과 각종 포장 랩분야에서 세계 3대 메이커로 꼽힌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외환위기 시절에도 흑자경영을 했다.
계열사로는 전기 애자 생산업체인 고려애자와 타일 제조업체인 삼영산업, 골프장인 제주 크라운CC 등 14개가 있다. 중국에도 합성수지 가공제품 법인인 삼영화학 다롄유한공사가 있다. 대재벌은 아니지만 `빚 하나 없을 정도로 건실한 기업들'이다.
이 이사장은 42년 3월 경남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경상학과에 입학했다.
"남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 특히 경제력을 우선 키워야 한다는 청운의 뜻을 품고 호랑이 굴로 들어간 거죠. 거기서 2학년을 마칠 무렵 학병으로 만주에 끌려가 여러 차례 사선을 넘나들었습니다. 이듬해 8·15해방을 맞아 귀국한 뒤 고향 의령에서 정미소업을 시작으로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는 6·25 휴전 이후 보다 큰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다각도로 사업을 모색하다 당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생필품 가운데서도 신소재 플라스틱 제품에 눈을 돌렸다. 타고난 건강과 근면, 그리고 철두철미하고 강한 추진력으로 59년 서울 영등포에 플라스틱 컵과 젓가락 등을 만드는 삼영화학공업㈜을 설립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6세. 그때부터 거의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회사를 일궜다.
이 이사장은 솔선과 근검이 몸에 밴 탓에 점심시간에도 늘 자장면을 즐겨먹을 만큼 구두쇠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자장면 회장'으로 불린다.
그는 또 경비를 최대한 아껴 쓰도록 시시콜콜한 것까지 직접 챙긴다. 직원들에게는 지금도 이면지를 사용하라고 채근할 정도다. 하지만 최고 시설을 들여온다든지, 최고 인재를 데려오고 키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돈을 모을 당시에 세상은 만인대 만인의 경쟁시대였소. 돈을 버는 데 거칠 수밖에 없었어요. 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빛과 그림자가 너무나 뚜렷했습니다. 세계 최대 부자였다는 록펠러는 한창 시절 불법 거래와 정경유착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록펠러재단' 등을 통해 그 재산을 대부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나는 록펠러만큼 `거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악인과 선인이란 평가를 동시에 받게 된 이유를 많이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도 선악의 양면이 있겠죠. 다만 남은 생은 선으로 악을 씻는 일에 더욱 노력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이사장은 기업인으로서의 자신의 인생이 항상 떳떳할 수만은 없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가 장학사업에 뜻을 둔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한 저의 인생 여정에서 이 세상에 하나의 작은 발자국이라도 보다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저는 `후손에게 한 광주리의 황금을 물려주는 것보다 한 권의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라'는 선대로부터의 오랜 가훈을 늘 되새겼습니다.
마침내 그것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 사람을 키우는 일에 쓰이도록 하기 위해 제가 삼영그룹의 재산을 일굴 수 있게 해준 우리 사회에 그것을 환원한 것입니다. 저는 비로소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못했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겠다'는 소박한 뜻을 실천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많은 돈을 사회에 기부하는데 가족의 반대는 없었을까.
"재산은 자식의 자질에 맞게 물려주면 됩니다. 특히 기업은 그렇습니다. 기업은 어차피 개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재능 없는 자식에게 물려줘서 없어질 것 같으면 사회에 환원하는 게 낫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자식에게 전혀 물려주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자식이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은 물려줬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족간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부를 결심하자 가족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소송을 거쳐 위자료 50억원을 주고 `황혼 이혼'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 이사장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다.
"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은 대재벌처럼 재산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도 아니고 세금을 덜 내보려는 속셈에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돈을 쉽게 벌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손을 위한 상속재산보다는 사회의 공익재산으로 영원히 남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개인기부가 기업기부보다 많아야 정상적입니다. 기업의 오너라도 개인재산이나 수입으로 기부를 해야 진짜 기부지, 기업재산이나 수입으로 하는 것은 간접기부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액수의 크고 작음을 떠나 보다 많은 분이 재산의 기부나 사회환원에 나서 주신다면 더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박응식기자 ntc21@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 제3회 한국CEO그랑프리, '아름다운 CEO상' 수상
- 6000억원 출연 국내 최대규모 장학재단 설립 운영
- "천사처럼 벌지는 못했지만 쓰는 것은 천사처럼"
"로마의 귀족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스스로 전장의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제국의 2000년 역사를 지탱해준 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이라고 했다.
그 같은 정신과 전통이 카네기와 록펠러,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등 서구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업 기부가 주류를 이루는 우리 현실에서 팔십 평생 기업을 일구면서 모은 전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한 개인 기부자의 미담도 매우 아름답게 다가온다.
지난해 11월2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3회 `한국CEO그랑프리' 시상식에서 `아름다운CEO'상을 받은 이종환 관정교육재단 이사장(82. 삼영화학그룹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6000억원 규모의 국내 최대 장학재단을 설립해 세계 1등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이종환 이사장. 2008년 무자년(戊子年) 새해 아침 그의 인생과 철학을 만나본다.
#국내 최대 장학재단
이 이사장은 2002년 사재 10억원을 출연해 관정교육재단을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수중에 있는 현금과 부동산 등 3000억원을 출연해 재단에 기부했다. 재산 기부는 이어져 현재 재단자산은 6000억원이 넘는다.
공익재단 전체로 보면 아산재단과 삼성문화재단 다음이지만 순수 장학사업만 펼치는 재단으로서는 국내 최대규모다. 삼성이나 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연매출 4000억원 규모의 중견그룹을 이끈 기업인이 만든 재단이란 점에서는 더욱 파격적이다.
관정재단은 우수학생 1인당 제공하는 장학금 규모나 선발인원에서도 국내 최대다. 이 재단을 통해 지난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주로 이공계를 중심으로 해외 유학생 100명, 국내 대학 재학생 1000명 등 총 1100명. 이들에게 지급된 총 장학금만도 자그마치 150억원에 달한다.
그가 이렇듯 인재양성에 자신의 전 재산을 출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70년대 말에 스위스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좁은 국토에 특별한 자원도 없는 데다 3개 언어의 다민족이 섞여 사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스위스는 세계 최고 부를 일궈냈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도 인재만 잘 키우면 스위스 못지않게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학생, 우수하지만 좀더 용기를 북돋워줘야 할 학생들을 지원해 준다면 언젠가는 그중에서 세계적인 인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이사장은 또 30여년 전 우연히 미국의 한 거대재벌가가 모텔 방에서 유언 하나 없이 혼자 초라하게 죽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돈 많으면 뭐합니까. 인생을 그런 식으로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때 언젠가는 죽기 전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조금 더 직접적인 계기는 둘째아들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면서다.
"아들녀석을 고치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했어요. 그런데 내가 환자 부모가 돼보니 우리나라 병원들이 너무 실망스럽더군요.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겠다고 생각했죠. 90년대 초부터 준비해 설계도를 완성하고 자금도 1000억원 정도 마련했어요. 그런데 허가가 안나는 겁니다. 여기저기 탄원도 해보고 취지도 알렸지만 안됐어요. 그래서 병원 설립의 뜻을 접고 대신 그 돈을 사회에 기부한 거죠."
그는 사회 여러 부문에서 자선가의 기부를 기다리고 있지만 인재 양성에 촛점을 맞췄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거기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업인이 기업활동의 결과로 축적한 자기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은 기업경영과는 별개의 문제겠지요. 작은 기부를 통해 미래의 재목이 될 인재를 길러낸다면 그것보다 더 큰 사회 기여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재산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역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다하려 하면 이도저도 안됩니다.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저에게 꿈이 있다면 우리 재단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으면 하는 것이죠."
장학재단을 운영하면서 우리 사회에 느낀 섭섭함도 감추지 않았다. 기부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너무 소홀하다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들 중에는 뜻있는 사회사업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문제는 자기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려고 해도 그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3000억원의 재산을 출연하는데 100억원의 세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또 재단 수익의 대부분이 임대소득에서 나오는데 이 소득에 대해 전면 과세를 하니까 장학사업 규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앞으로 공익재단 만드는 일에는 이런 부담을 덜어줘야 합니다."
#'자장면 회장님'
삼영화학그룹은 1959년 4월에 설립된 삼영화학공업이 모태. 석유합성수지 가공 플라스틱 전문 제조업체로 전자제품용 초박막 축전 콘덴서 필름과 각종 포장 랩분야에서 세계 3대 메이커로 꼽힌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외환위기 시절에도 흑자경영을 했다.
계열사로는 전기 애자 생산업체인 고려애자와 타일 제조업체인 삼영산업, 골프장인 제주 크라운CC 등 14개가 있다. 중국에도 합성수지 가공제품 법인인 삼영화학 다롄유한공사가 있다. 대재벌은 아니지만 `빚 하나 없을 정도로 건실한 기업들'이다.
이 이사장은 42년 3월 경남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경상학과에 입학했다.
"남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 특히 경제력을 우선 키워야 한다는 청운의 뜻을 품고 호랑이 굴로 들어간 거죠. 거기서 2학년을 마칠 무렵 학병으로 만주에 끌려가 여러 차례 사선을 넘나들었습니다. 이듬해 8·15해방을 맞아 귀국한 뒤 고향 의령에서 정미소업을 시작으로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는 6·25 휴전 이후 보다 큰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다각도로 사업을 모색하다 당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생필품 가운데서도 신소재 플라스틱 제품에 눈을 돌렸다. 타고난 건강과 근면, 그리고 철두철미하고 강한 추진력으로 59년 서울 영등포에 플라스틱 컵과 젓가락 등을 만드는 삼영화학공업㈜을 설립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6세. 그때부터 거의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회사를 일궜다.
이 이사장은 솔선과 근검이 몸에 밴 탓에 점심시간에도 늘 자장면을 즐겨먹을 만큼 구두쇠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자장면 회장'으로 불린다.
그는 또 경비를 최대한 아껴 쓰도록 시시콜콜한 것까지 직접 챙긴다. 직원들에게는 지금도 이면지를 사용하라고 채근할 정도다. 하지만 최고 시설을 들여온다든지, 최고 인재를 데려오고 키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돈을 모을 당시에 세상은 만인대 만인의 경쟁시대였소. 돈을 버는 데 거칠 수밖에 없었어요. 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빛과 그림자가 너무나 뚜렷했습니다. 세계 최대 부자였다는 록펠러는 한창 시절 불법 거래와 정경유착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록펠러재단' 등을 통해 그 재산을 대부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나는 록펠러만큼 `거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악인과 선인이란 평가를 동시에 받게 된 이유를 많이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도 선악의 양면이 있겠죠. 다만 남은 생은 선으로 악을 씻는 일에 더욱 노력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이사장은 기업인으로서의 자신의 인생이 항상 떳떳할 수만은 없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가 장학사업에 뜻을 둔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한 저의 인생 여정에서 이 세상에 하나의 작은 발자국이라도 보다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저는 `후손에게 한 광주리의 황금을 물려주는 것보다 한 권의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라'는 선대로부터의 오랜 가훈을 늘 되새겼습니다.
마침내 그것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 사람을 키우는 일에 쓰이도록 하기 위해 제가 삼영그룹의 재산을 일굴 수 있게 해준 우리 사회에 그것을 환원한 것입니다. 저는 비로소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못했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겠다'는 소박한 뜻을 실천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많은 돈을 사회에 기부하는데 가족의 반대는 없었을까.
"재산은 자식의 자질에 맞게 물려주면 됩니다. 특히 기업은 그렇습니다. 기업은 어차피 개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재능 없는 자식에게 물려줘서 없어질 것 같으면 사회에 환원하는 게 낫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자식에게 전혀 물려주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자식이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은 물려줬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족간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부를 결심하자 가족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소송을 거쳐 위자료 50억원을 주고 `황혼 이혼'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 이사장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다.
"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은 대재벌처럼 재산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도 아니고 세금을 덜 내보려는 속셈에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돈을 쉽게 벌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손을 위한 상속재산보다는 사회의 공익재산으로 영원히 남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개인기부가 기업기부보다 많아야 정상적입니다. 기업의 오너라도 개인재산이나 수입으로 기부를 해야 진짜 기부지, 기업재산이나 수입으로 하는 것은 간접기부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액수의 크고 작음을 떠나 보다 많은 분이 재산의 기부나 사회환원에 나서 주신다면 더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종환 이사장의 지나온 길 <학력> 1924년 경남 의령 출생 1942년 경남 마산공립중학학교 5년 졸업 11944년 일본 메이지대학 경상학과 2년 수료 1999년 경남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취득 2004년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육학박사 취득 <경력> 1959년 삼영화학공업㈜ 설립 1978년 고려애자공업㈜ 설립 1986년 극동도기㈜ 설립 1990년 삼영창업투자㈜ 설립 1995년 ㈜뉴크라운관광호텔 설립 1997년 삼영필름㈜ 설립 1999년 ㈜크라운컨트리클럽 설립 2000년 재단법인 관정이종환재단 설립 2002년 관정이종환교육재단으로 개칭 <상훈> 1985년 대통령 표창(애자 신제품 개발 공로) 2003년 장영실과학문화상 본상 수상 2003년 금탑산업훈장 수상(대통령) 2004년 백범문화상 수상 |
박응식기자 ntc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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